유럽연합(EU)의 산림전용방지법(EUDR) 완화 제안은 중소기업의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였지만, 브라질 농업계에는 오히려 배신감을 안겼습니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선제적으로 투자한 기업들이 경쟁 우위를 잃게 되었고, 미국의 고율 관세까지 겹치면서 수출 판로는 더욱 좁아지고 있습니다.
EU는 무엇을 완화했나?
EU는 2024년 10월 EUDR 완화안을 발표했습니다. 마이크로 및 소규모 1차 운영자에게는 단 한 번의 간단한 신고만 요구하고, 이미 국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경우 별도 신고를 면제했습니다. 소규모 기업은 2026년 12월 30일부터, 대기업은 2025년 12월 30일부터 규제가 적용되며, 최초 6개월간은 단속과 처벌이 유예됩니다.
더 나아가 상품을 최초로 시장에 진입시키는 1차 운영자에게만 실사·신고 의무를 집중시키고, 이후 가공·유통 단계의 하류 기업들은 추가 신고 의무에서 면제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초콜릿 제조업체는 원료인 카카오에 대한 별도 실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IT 시스템 과부하를 방지하고 행정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European Commission / Reuters / Fresh Plaza
브라질은 왜 실망했을까?
선제 투자자들의 배신감
브라질 농업 수출업체들은 EUDR 규정 준수를 위해 공급망 추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위성 데이터 기반 산림 모니터링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습니다. 지속가능성 인증을 확보하며 유럽 시장에서 프리미엄을 기대했지만, EU의 집행 유예와 완화안은 이러한 기대를 무너뜨렸습니다.
무엇보다 조기 투자자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경쟁 우위가 사라졌다는 점이 큰 불만입니다.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준비하지 않은 기업들도 손쉽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고, 선제적으로 투자한 기업들의 노력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라보뱅크 분석가 마르셀라 마리니는 “벌금 부재와 집행 지연이 지속가능성 프리미엄에 대한 동기를 약화시킨다”고 지적했습니다. Reuters
브라질 정부의 반발
브라질 농림축산부 장관 카를로스 파바로는 EU 규정을 “브라질 주권을 침해하는 벌칙성 조치”로 규정하며, 브라질이 산림 감소를 30.6% 줄인 노력을 무시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산림법을 운영하고 있으며, 농지의 상당 부분을 법적으로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EU가 이러한 노력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규제를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비관세 장벽이며, 특히 소규모 생산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브라질 내부에서도 입장은 엇갈립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오히려 규제 지연이 산림파괴 억제 노력에 역행한다며 EU에 반대 서한을 제출했습니다. 이들은 환경 보호보다 경제적 편의가 우선시되는 상황을 우려하며, 완화안이 불법 벌목과 농지 확장을 조장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intelliNews / Business & Human Rights Resource Centre
미국 관세까지 겹친 이중고
2025년 8월부터 미국 정부는 브라질산 농수산물에 50% 고율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커피, 오렌지 주스, 소고기 등이 타격을 받았으며, 미국은 브라질 농업 수출의 약 7%를 차지하는 중요 시장입니다. 대미 수출이 막히자 브라질 정부는 중동 및 아시아 시장 개척에 집중하면서 EU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EUDR 완화안이 가져온 혼란은 더욱 큰 타격으로 다가왔습니다. farmdoc daily / Agrolatam
커피 산업의 직격탄
브라질은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하는 최대 생산국으로, 유럽과 미국은 주요 수출 시장입니다. 미국 관세로 대미 커피 수출 가격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EU 시장에서는 EUDR 준수 여부에 따라 프리미엄이 결정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완화안으로 그 기대마저 무너졌습니다. 일부 브라질 커피 수출업체들은 아시아와 중동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지만, 이들 시장은 유럽이나 미국만큼 높은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며 물류 인프라도 덜 발달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브라질 커피 산업은 가격 하락과 수익성 악화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Agrolatam / Mr. Bean Coffee
시장 혼란과 구조 재편 우려
EUDR 적용으로 브라질산 콩, 커피, 소고기 등 주요 품목이 2025년부터 약 160억 달러 규모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브라질 수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금액입니다. 소규모 생산자들은 규제 준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시장에서 밀려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대형 기업 위주로 시장이 재편될 위험이 있습니다.
분석가들은 완화안이 글로벌 공급망에 혼선을 초래하며, 지속가능성 기준 강화 노력을 퇴보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선제적으로 투자한 기업들이 보상받지 못하면서, 향후 지속가능성 관련 규제에 대한 기업들의 신뢰와 참여 의지가 약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Climate Policy Initiative
수출 다변화로 활로 찾는 브라질
브라질은 중국, 인도, 중동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며 수출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EU 양쪽에서 규제와 관세 압박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브라질 정부는 시장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외교적·무역적 노력을 강화 중입니다. 이들 신흥 시장은 아직 EUDR과 같은 엄격한 규제를 요구하지 않지만, 점차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브라질이 선제적으로 자체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EU나 미국의 규제에 덜 의존하면서도 지속가능성 프리미엄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브라질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단순한 원료 공급자가 아닌 지속가능성 리더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CSIS
지속가능성 정책의 신뢰 회복이 관건
EU의 EUDR 완화안은 단기적으로 중소기업 부담을 덜어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속가능성 정책의 신뢰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습니다. 선제 투자자들이 보상받지 못하면 미래 환경 규제에 대한 기업들의 신뢰는 무너질 것입니다. 반대로 규제가 너무 엄격하고 급격하면 소규모 생산자는 밀려나고 대형 기업만 살아남는 구조가 고착화됩니다.
브라질의 사례는 규제와 시장 인센티브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환경 보호와 경제적 지속가능성, 그리고 국가 주권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이 될 것입니다. DW / Mr. Bean Coff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