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루블 커피도 피할 수 없다, EUDR 확대가 바꾸는 글로벌 커피 공급망
유럽연합의 산림벌채방지규정(EUDR)이 2026년 5월, 솔루블 커피까지 적용 범위를 확대하며 글로벌 커피 산업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습니다. 대기업 기준 이행 기한은 2026년 12월 30일로 못 박혔고, EU는 동시에 행정 비용을 최대 75% 절감하는 간소화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규정 준수를 향한 길이 다소 넓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생산 현장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GCR
솔루블 커피, 왜 이제야 포함됐나
EUDR은 본래 원두 커피를 중심으로 설계된 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스턴트·캡슐 등 가공 형태로 유통되는 솔루블 커피가 전 세계 커피 소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규정의 실효성에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결국 유럽 집행위원회는 이번 개정을 통해 솔루블 커피를 적용 범위에 포함시키며 허점을 막았습니다. 행정 비용 75% 절감이라는 간소화 조치는 규정 준수 부담을 낮추기 위한 유인책으로 함께 제시되었지만, 문제는 비용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 있습니다.Food Navigator / Food and Drink Technology
엇갈리는 생산국의 셈법
브라질은 왜 물러서지 않는가
브라질 정부는 EUDR에 가장 강경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생산국입니다. 이 규정이 브라질의 對EU 수출 약 1/3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반발의 핵심 근거입니다. 브라질 정부는 공식 성명을 통해 EUDR을 “일방적이고 징벌적(unilateral and punitive)”이라 규정하며 연기와 재검토를 EU에 공식 요구했습니다. 솔루블 커피 편입이 확정된 2026년 5월 이후에도 브라질 농업부 장관 André de Paula는 illycaffè 회장 및 이탈리아 대사와 직접 면담하며 이행 문제를 집중 논의했습니다. 외교 채널까지 가동한 브라질의 행보는, 이 규정이 단순한 통상 문제를 넘어 국가 차원의 정치 의제임을 보여줍니다.Click Petróleo e Gás / Perfect Daily Grind
베트남의 선택: 저항 대신 적응
베트남은 방향이 다릅니다. 공식 반발 대신 전략적 순응을 택한 베트남 농업농촌개발부(MARD)는 EUDR 이행 행동계획 프레임워크를 발표했고, 주요 커피 산지인 닥락(Dak Lak) 성은 약 15만 헥타르를 커버하는 디지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추진 중입니다. 하지만 내부 사정은 낙관과 거리가 있습니다. 베트남 커피-코코아 협회(VICOFA)에 따르면 현재 베트남 커피 수출량 중 EUDR 추적 요건을 충족하는 비율은 고작 35~40%에 그칩니다. 무엇보다 소규모 농가의 디지털 지도화 비용과 데이터 공유 프로토콜 부재가 핵심 장벽으로 지목되며, 이는 단기간 내 해소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입니다.Vietnam.vn / UNDP
로부스타 공급망의 구조적 딜레마
솔루블 커피 편입이 유독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원료의 특성에 있습니다. 솔루블 커피의 핵심 원료인 로부스타는 브라질과 베트남이 세계 최대 산지입니다. 단일 농장 추적이 비교적 용이한 아라비카와 달리, 로부스타는 다수 소규모 농가의 물량이 혼합 가공되는 방식으로 공급망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국 원산지 추적 자체가 구조적으로 훨씬 복잡하고, 같은 규정이라도 로부스타 생산자들이 짊어지는 준수 비용은 아라비카 대비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Food and Drink Technology
ICO가 던진 경고
국제커피기구(ICO)는 생산국 98%를 대표하는 기구로서 공식적으로 EUDR 시행 연기를 촉구해왔습니다. ICO의 Vanusia Nogueira 사무총장은 “농가들이 기한 내 규정을 준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명시적으로 발언했습니다. ICO 내부 서베이에 따르면 커피 농가의 80%가 자신의 재배 구획을 아직 지도화하지 못했고, 추적 시스템을 갖춘 비율은 전체의 1/3에 불과합니다. 규정 자체의 방향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준비 속도와 정책 일정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현실적 호소입니다.World Coffee Portal
규정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EUDR은 산림 파괴를 막겠다는 당위 면에서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정책입니다. 하지만 2026년 12월이라는 시계가 똑딱이는 동안, 공급망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준비를 끝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브라질의 외교적 저항과 베트남의 선제 적응이라는 대조적인 전략은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합니다. EU가 요구하는 투명성의 속도와 생산 현장이 감당할 수 있는 변화의 속도, 그 간격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솔루블 커피의 편입은 규정의 완성도를 높이는 조치였지만, 동시에 글로벌 커피 산업이 감당해야 할 과제의 무게도 함께 키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