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커피 협동조합을 흔드는 새 법령, 13만 소농의 생계가 위태롭다
2026년 8월, 페루에서 발효를 앞둔 한 법령이 커피 산업 전체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이름은 DS 015-2026-EF(시행령 015호)와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 32434 “농업 현대화 촉진법”. 공식 목표는 농업의 현대화와 경쟁력 강화이지만, 페루 커피 협동조합을 대표하는 최대 단체 JNC(페루 전국커피위원회)는 이 법령이 오히려 13만 소농의 수출 기반을 해체할 수 있다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협동조합이 소농에게 의미하는 것
페루 커피는 세계 유기농·공정무역 커피 시장에서 손꼽히는 생산국입니다. 그런데 이 커피 대부분은 산악 오지에서 평균 3.5헥타르(축구장 5개 크기) 남짓의 땅을 일구는 소농들이 만들어냅니다. 이들이 국제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바로 협동조합입니다.
협동조합은 단순한 모임이 아닙니다. 소농 수백~수천 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커피를 모아서 함께 수출하고, 세금 환급을 일괄 신청하며, 비료·농기계 같은 투입재를 공동 구매합니다. 개별 소농이 혼자서 수출 계약을 따내거나 세금 서류를 처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협동조합이 이 모든 상업·행정 업무를 ‘대신’해주는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적으로 인정된 “대표행위(acto de representación)”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왜 생겼나
사실 이 제도는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닙니다. 2000년대 후반, 페루 국세청(SUNAT)은 협동조합이 소농의 커피를 모아 수출하는 행위를 ‘상업적 판매’로 보고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협동조합들이 줄줄이 도산 위기에 처하자, 업계는 10년에 가까운 법적 싸움 끝에 2011년 승리했습니다. “소농이 협동조합에 커피를 맡기는 것은 팔고 사는 거래가 아니라, 자기 물건을 자기 조직에 위탁하는 것”이라는 원칙이 법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협동조합이 소농을 대신해 행정·조세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새 법령은 무엇을 바꾸나
DS 015는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집습니다. 앞으로는 세금 환급이나 수출 환급금(드로백)을 협동조합이 일괄 신청하는 것이 아니라, 소농 개개인이 직접 국세청에 신청해야 합니다. 또한 세금 혜택을 받으려면 농업부(Midagri)가 발급하는 공식 확인 서류를 갖춰야 합니다.
제도 설계의 취지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 임원이 환급금을 받은 뒤 조합원에게 투명하게 나눠주지 않는다는 문제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고, 개별 소농이 혜택을 직접 받도록 하면 이런 불투명성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법률을 분석한 BDO 페루에 따르면, 이 법은 연소득 30 UIT(약 1,650만 원) 이하 소농에게는 소득세를 면제하고, 드로백도 실제 수출에 기여한 조합원 비율대로 나누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BDO Perú
그런데 현실은 왜 다른가
문제는 이 법이 전제하는 ‘개별 소농’의 모습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입니다. 이 법이 작동하려면 소농 각자가 세금 등록번호를 가지고 있고, 국세청에 정기적으로 신고하며, 농업부 데이터베이스에 본인 농지와 생산량이 정확히 등록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JNC 의장 Delky Gutiérrez는 “농업부는 200만 소농의 토지 소유 정보를 업데이트하지 못했고, 생산량과 판매량도 인증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오지 마을에서 국세청 창구까지 2~3일이 걸리는 소농에게 개별 세금 신청을 요구하는 것은, 제도적으로는 허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Agraria.pe
더불어 2022년에 이미 IGV(부가가치세) 환급을 협동조합에 허용한다는 법이 통과되었지만, 시행 세칙이 마련되지 않아 수천 건의 환급 신청이 체계적으로 기각되어 온 전례도 있습니다. 협동조합 측이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데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습니다. JNC
수출 시장으로의 파장
이 갈등이 단순한 국내 정책 문제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페루는 전 세계 유기농·공정무역 커피 시장에서 최대 공급국 중 하나이며, 2026년 1월 기준 월간 커피 수출액은 약 8,600만 달러에 달합니다. 그리고 이 수출의 핵심 채널이 바로 협동조합입니다. Diario Voces
수출 환급금 처리가 개별 소농 단위로 분산될 경우, 협동조합은 가격 경쟁력과 계약 이행 안정성 모두에서 즉각적인 불확실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 EU가 2025년부터 시행 중인 산림벌채 방지 규정(EUDR)에 대응하기 위해 협동조합들이 구축 중인 농지 추적 시스템도 협동조합 기반이 약해지면 소농 단위 인증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업계의 요구, 정부의 침묵
JNC와 협동조합 지도부는 2026년 3월부터 농업부, 경제재정부, 국무조정실에 반복적으로 면담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법령의 전면 폐기가 아닙니다. 핵심 요구는 국무조정실 주도의 고위급 실무협의체(Mesa de trabajo)를 구성해 협동조합 현실에 맞는 단계적 이행 경로를 함께 설계하자는 것입니다. 아울러 반협동조합적으로 작동하는 조항의 폐기, 기존 IGV 혜택 이행 세칙 마련, 대기업과 소농 간 조세 형평성 보장도 함께 촉구하고 있습니다. JNC
이 논쟁의 본질은 결국 “제도가 지향하는 방향”과 “그 제도를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인프라” 사이의 간극입니다. 정부는 투명성과 개별 책임 강화를 원하고, 협동조합은 그 이행 비용을 소농이 감당할 현실적 기반이 없다고 맞섭니다. 2026년 8월 발효라는 시계가 돌아가는 가운데, 정부가 협의 테이블에 앉을지 여부가 페루 커피 산업의 향방을 가를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온두라스 7개 커피 협동조합이 데이터 허브가 되어 EUDR 대응한다
